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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um&Bass] 지금 한국에서 아티스트의 운명은 “잊혀지는 것?” comment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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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지] “박준흠이 만난 아티스트”(10권) 지금 한국에서 아티스트의 운명은 “잊혀지는 것?” - 그렇다면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시대를 노래하는 거장 및 주목할 만한 아티스트들의 ‘인터뷰 단행본’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그간 엄인호, 김민규, 안치환, 김창기 님 인터뷰를 진행했고, 계속해서 아티스트 인터뷰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시리즈 1차로 총 10권을 차례로 발간하는 것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 1980~90년대에 데뷔한 대중음악 거장들이 영미권에서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음반, 공연 활동조차 어려운 이유는 이들의 ‘아티스트 밸류’가 음악소비로 이어지지 않는 수준으로 급감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원인도 대안도 있을 것입니다.

“박준흠이 만난 아티스트” 기획은 ‘아티스트 밸류’ 문제를 고민하다가 나온 것이고, 이를 같이 생각해 보고 싶어서 긴 글을 썼습니다. 현재 한국 대중음악에서 가장 근본적인 정책연구과제일 것입니다.



■ 나는 왜 이 작업을 하는가?

 

1. LP의 탄생과 작품(앨범), 아티스트, 음악비평의 시작

 

1948년 6월 21일, 미국 컬럼비아 레코사에서 지름 30cm LP레코드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최초의 LP 레코드는 브루노 발터(Bruno Walter)가 지휘한 뉴욕 필하모닉의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다.

 

종래 1분에 78회씩 돌던 SP를 대신해 33과 1/3을 회전하는 이 LP 개발로 재생시간이 7~8분(SP A/B면)에서 40~50분(LP A/B면)으로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1960년대 들어서는 스테레오, 하이파이 사운드 시대까지 시작되었다. SP 음반에서는 4분 이내 곡이 A면과 B면에 각기 1곡씩 총2곡이 수록되었다면, LP 음반에서는 A면과 B면에 걸쳐 10여 곡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수록 시간의 증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뮤지션 입장에서는 특정 ‘콘셉트’를 갖는 연결곡들이 수록된 음반을 발표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중음악에서 ‘작품’ 개념이 탄생된 것이다.

 

즉, 이전 SP 음반은 지금의 디지털싱글 개념이었고, LP 탄생으로 인해서 뮤지션은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보다 일관성 있게 표현할 수 있게 되어 현대적인 의미의 ‘대중음악 작품’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앨범(album)’이라는 개념이 본격화되고, 뮤지션이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LP 탄생 이후 음악비평도 본격화되는데, 이는 LP로 인해서 비로소 ‘작품(앨범)’과 ‘아티스트’라는 비평대상이 명확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음악비평의 두 갈래가 ‘작품론’과 ‘아티스트론’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대중음악에서 ‘아티스트’ 의미는 ‘작품을 발표하는 뮤지션’으로 볼 수 있다. 음악을 잘하고 못하고가 아티스트를 가르는 기준이 아니라, ‘작품’으로서의 음반을 발표하는지 여부가 기준인 것이다. 정확히 얘기하면 ‘창작앨범’ 발표 여부다.

 

‘작품론’도 세부적으로 나누면 영화에서 작가(감독)를 얘기할 때 ‘필모그래피’를 거론하는 것처럼 대중음악에서도 아티스트가 작품을 발표한 이력을 살펴보는 ‘디스코그래피’가 있는데, 여기에는 음반리뷰를 포함한다. 그리고 ‘디스코그래피’를 기술할 때는 아티스트가 발표한 정규앨범(풀렝스앨범)과 EP를 중심으로 다루는데, 그래서 1집, 2집, 3집, 3.5집, 4집... 이런 식으로 기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서는 보통 디지털싱글과 베스트앨범, 리메이크앨범, 컴필레이션 등은 다루지 않는데, 그렇다는 얘기는 대개 정규앨범(풀렝스앨범)과 EP만 아티스트의 ‘작품’으로 본다는 의미다.

 

종합적으로 다시 얘기하면, 대중음악에서는 LP 탄생 이후 작품(앨범) 개념이 생기고, 작품을 발표하는 아티스트 개념이 정립되고, 작품론과 아티스트론을 중심으로 ‘음악비평’이 본격화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는 얘기는 미국에서는 1948년 이후에, 한국에서는 1960년대 들어서 음악비평이 실질적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2. 한국에서 음악미디어와 음악비평의 시작

 

미국에서는 대표적인 음악미디어인 격주간 음악전문지 롤링 스톤(Rolling Stone)이 창간된 해가 1967년이다. 이는 1960년대 초반 밥 딜런과 비틀즈 데뷔 이후 현대적인 의미의 뮤직비즈니스가 본격화된 측면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즉, 음악미디어는 음악산업 안에서 다양한 방식(장르, 소비자, 스테디셀러, 명예의전당 등)으로 음악시장을 성장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미국과 경우가 좀 다르지만, 1967년에 최초의 팝음악 잡지였던 ‘팝스 코리아나’가 조용호, 이해성, 서병후가 함께 만든 출판사에서 창간되었다. 그리고 해외 팝음악 전문지 형태로 정보와 비평을 동시에 다룬 음악전문지로는 ‘월간팝송’이 있었는데, 1971년 11월에 창간되었다. 초기 ‘월간팝송’은 기사의 양에 비해서 악보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 높았지만 점차 악보는 줄어들고 기사양이 늘어났고, 국내 팝음악 시장을 키우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하지만 음악미디어의 핵심 콘텐츠인 ‘음악비평’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1990년대 들어서이다. 그 이전에 음악잡지에서 한국 대중음악을 다루는 방식은 뉴스, 부록 콘텐츠에 더 가까웠고 진지하게 작품론과 아티스트론을 다루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대중음악평론가라는 용어도 1990년대 들어서 등장했는데, 그 이전에 경음악평론가, 팝컬럼니스트가 보편적인 용어였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 한국 대중음악은 평론의 대상도 아니었다. 


영미권에서 발매되는 앨범과 비슷한 개념과 퀄리티로 음반이 발매되기 시작한 시기가 1984년 따로또같이 2집과 1985년 들국화 1집 무렵부터이기 때문에 당시 평론가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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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언더그라운드 음악씬과 연예엔터의 시작

 

1984년은 김현식 2집과 따로또같이 2집, [우리노래전시회]가 나온 시기이고, 1985년은 들국화 1집이 나오면서 대략 1995년까지 언더그라운드 음악씬이 존재했던 시기다. 물론 1990년 11월에 김현식이 사망한 시기부터 한국에서 언더그라운드 음악씬은 쇠락하기 시작하지만, 그래도 1995년까지는 그 명맥이 유지되었고, 공교롭게도 1995년 3월에 킹레코드에서 연달아서 김광석의 [다시부르기 2](KSC-4139)와 안치환 4집(KSC-4140)이라는 1990년대를 대표하는 명반이 나온다. 그리고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두 음반은, 1997년에 발표되는 장필순 5집과 함께 조동익 프로듀싱/조동익밴드 세션이 행한 3대 걸작이기도 하다.

 

1995년은 한국에서 케이블TV가 개국하면서 6개의 공중파TV(MBC, KBS1, KBS2, SBS, EBS, AFKN) 채널이 수백개로 늘어나면서 영상시대가 개막된 시기였고, 지금의 K-POP 시스템을 설계한 이수만이 SM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한 시기다. 알다시피 이수만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음반기획사의 ‘경영리스크’를 최소화시킨 ‘아이돌 연습생 제도’를 ‘발명’한 혁신적인(긍정/부정의 의미를 떠나서) 경영자다. 여기서의 방점은 ‘경영리스크’ 최소화일 것이다. 그래서 이수만이 1995년에 발명한 이 시스템은 30년 가까이 되었음에도 원형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여기에 추가된 점이 있다면 하이브처럼 플랫폼사업을 결합한 경우다.

 

이전 음반기획사들의 가수 발굴 시스템이 보통 ‘성인’들에게 계약금 주고 계약해서 음반 발표하면 판매금에서 일정 인세를 주는 방식이었다면, 이수만의 ‘아이돌 연습생 제도’는 10대 아이들을 자체오디션을 통해서 영입한 다음 2~5년의 연습기간을 통해서 선별적으로 데뷔시키는 방식이다. 비록 데뷔 전까지 일정 비용이 들지만 지출대비 수입이 예상되고, 대등한 관계로 계약하게 되는 성인들에 비해서 연습생들은 통제도 용이하고(돌발변수도 거의 없고), 이전에 행한 성인들 계약 방식과는 달랐기 때문에(한때 노예계약이란 비난까지 받음) 안정성이 높았다. 


그리고 케이블TV 개국으로 인해서 연예콘텐츠 수요가 높았기 때문에 SM엔터에 이어서 JYP엔터, YG엔터가 연달아서 설립되면서 최근의 3대 연예기획사가 된 것이다. 물론 2000년대 초반에 1차 한류가 꺼지면서 2000년대 중반에는 연예기획사들의 경영이 어려워졌지만, 2008년 무렵부터 유튜브를 비롯한 페이스북 등의 SNS 시대가 시작되면서 K-POP 홍보마케팅이 극적으로 수혜를 입는다.

 

 

4. 2010년대 K-POP의 성장과 1980~90년대 아티스트의 위기

 

2010년대 들어 유튜브 등의 도움으로 연예기획사들의 아이돌들이 영미권 음악시장으로까지 진출하는 획기적인 일들이 발생하는데, 이는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대 사건이었다. 사실 2013년 무렵까지를 보면, 이수만을 비롯한 방시혁까지도 영미권 음악시장 진출은 불가능한 미션으로 봤다. 다들 중국 음악시장 진출이 그나마 이룰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라고 인터뷰 등에서 밝혔다.

 

그런데 2014년에 CJ ENM의 KCON을 통해서 당시 빅히트뮤직 본인들도 몰랐던 해외마케팅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했다. 빅히트뮤직이 자금이 없다보니 BTS 멤버들이 1년 동안 죽기살기로 행한 SNS 활동과 유튜브 콘텐츠 생산이 오히려 해외까지 팬덤을 만들어낸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후는 다들 아는 K-POP의 전성시대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K-POP이 국내외적으로 전성기를 맞으면서 1980~90년대에 데뷔한 뮤지션들이 위기를 맞은 것이다. 1980~90년대는 전술했다시피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예술성을 꽃피우면서 영미권의 언더그라운드 음악씬에 근접한 자체적인 음악씬을 만들어냈고, 심지어 언더 뮤지션들이 상업성까지 획득한 시기였다. 이번에 인터뷰를 진행한 엄인호, 김민규, 안치환, 김창기 중에서 김민규를 제외하면 다들 ‘밀리언셀러’ 아티스트들이다. 신촌블루스 1집 30만장, 동물원 1집 100만장, 안치환 4집 60만장 판매는 알려진 사실이고, 이들의 디스코그래피 전체로 계산하면 각자 200만장 이상 음반을 판매한 뮤지션들일 것이다.

 

물론, 아티스트들의 위기는 2010년 이전인 1995년부터 시작된 것이기는 하다. 1995년은 한국에서 대중음악 제작시스템이 변화하는 시기이기도 한데, 이는 1992년 서태지 데뷔 후 나타나기 시작한 FM라디오의 편성 변화(가요 중심, 신곡 배제 등)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이전 FM라디오는 ‘음악전문라디오’ 성격이었고, 해외음악 편성이 주였고, 심지어는 전영혁이나 성시완과 같은 전문DJ들이 활동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동시대의 ‘빌보드 싱글 200’을 소개해 주는 프로그램까지 있었기 때문에 팝음악의 고전에서부터 신곡까지 정기적으로 소개해주는 창구 기능을 했다. 이게 한국에서 음악마니아들을 양산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1988년부터 EMI를 필두로 해외 메이저음반사들이 라이선스 방식 대신 직배 방식으로 한국 음악시장에 진출했으나, FM라디오의 편성에서 많은 변화가 생긴 1995년에서 불과 5년이 지나면서부터는 해외 팝음반 판매의 급격한 감소로 직배사들이 서서히 한국 음악시장에서 떠나기 시작한다.

 

물론 이 시기는 MP3 문제로 음반판매가 감소되는 시기였지만, 전 세계 음악시장에서 급격하게 음반판매가 감소되고, 특히 해외 팝음반 판매가 급격하게 감소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할 것이다. 즉, 한국에서 2000년대 들어 음반시장이 몰락한 계기는 1993~1995년부터 있었던 것이고, 이게 해외 팝음반 판매 감소부터 시작되었고, 이는 ‘음악마니아 성격의 음악소비자’ 수의 감소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고, 결국 아티스트들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든 배경이 아닌가 한다.

 

다시 ‘2010년대 K-POP의 성장과 1980~90년대 아티스트의 위기’ 부분으로 가면, ‘위기’의 원인으로 1985~1999년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만큼 1996~2014년의 인디 뮤지션들이 매력적이지 못했다는 점을 이야기 할 수 있고, 전체적으로 뛰어난 창작앨범들이 이전만큼 나오지 않아서 음악소비자들을 끌어들이지 못했다는 점도 꼽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대중음악에서 ‘창작의 쇠퇴’가 확연히 보이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2015년 이후이고, 이전에는 상업성과 상관없이 나름대로 좋은 창작앨범을 내는 뮤지션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2010년대 K-POP의 성장이 아티스트의 위기, 창작의 쇠퇴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사실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까지는 얘기를 못하겠지만, 앞에서 1985년 이후 한국 음악시장 변화에서 예를 든 것처럼 시기적으로 ‘대중음악 환경 변화’에 영향을 줬다고는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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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015년 이후 대다수 비아이돌 뮤지션들의 ‘아티스트 밸류’는 음악소비로 이어지지 않는 수준으로 급감

 

현재 한국에서 정상적으로 활동이 가능한 뮤지션은 네 부류 정도다.

- 첫째, 대략 상위 20개 연예기획사 소속 뮤지션

- 둘째, TV 오디션프로그램을 통해서 인지도를 얻은 뮤지션

- 셋째, 행사시장에서 먹히는 음악을 하고 있는 뮤지션

- 넷째, 공중파방송 출연 등으로 얻은 확고한 인지도를 바탕으로 활동하는 뮤지션

 

그런데, 위의 경우 넷 다 사실 뮤지션 음악의 ‘예술성’과는 무관하다. 즉, 이제 한국에서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인정받기 위해서 뛰어난 창작앨범을 냈는지 여부는 하등 관계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음악미디어가 없다보니까, 뛰어난 창작앨범을 냈다고 한들,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음반리뷰를 써주는 곳도 없다. (소규모 웹진에서 다뤄주는 소수의 리뷰 정도만 있고.) 더 심각한 문제는 1년에 2,500장 이상 나오는 것 같은 정규, EP 앨범들을 선별해서 ‘소비 가이드’를 해주는 곳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창작앨범’을 중시하는 아티스트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인 것이다.

 

2020년대 현실만 놓고 본다면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는 거의 모든 뮤지션들은 사실상 관 안에 들어가서 땅에 묻힌 상황이다. 1990년대까지 밀리언셀러 아티스트였건, 많은 이들의 청춘에 위로와 기쁨을 줬던 아티스트였건,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앨범을 몇 장씩 올린 예술성이 뛰어난 아티스트였건 모두 다 동일하다. 아마 이도 전 세계 음악시장에서 한국만이 갖는 심각한 특성일 것이다.

 

한마디로 영미권과 일본 음악시장에는 보편적으로 있는 어덜트 컨템포러리 음악시장, 클래식 록/팝 음반(바하, 모차르트의 음악처럼 100년 1000년 소비될 것이란 의미. 일례로 밥 딜런, 비틀즈 음반), 20~60대 음악소비자라는 개념은 한국에서는 2010년대 들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그리고 과연 누가 어떤 방법으로 관뚜껑을 다시 열고 아티스트들을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인가?

 

 

6. 대다수 비아이돌 뮤지션들의 ‘아티스트 밸류’가 급감한 원인

 

이에 대한 원인은 너무나 복잡다단해 보이지만 신기하게도 이에 대한 연구나 하다못해 정책포럼 같은 것도 행해진 적은 없다. 문화부나 한콘진 같은 곳도 현재 상황이 시대의 변화에 따른 ‘당연한 수순’ 정도로 보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솔직히 정부 차원에서는 만들 수가 없는 ‘국제음악마켓’을 만들겠다고 10년 이상 진행하고 있는 ‘뮤콘’ 같은 ‘행사’에 매년 10억원 이상씩 쓸 돈이 있으면, 차라리 중견 아티스트들이 활동할 수 있게 ‘내수음악시장’을 활성화하는 방안을 탐구하는 정책연구사업에 예산을 써야하는 것은 아닐까?

 

현상만 놓고 본다면, 대다수 비아이돌 뮤지션들의 ‘이미지’는 현재 트렌드의 음악과는 별개의 이미지로 전락했고, 이들의 ‘아티스트 밸류’는 음악소비로 이어지지 않는 수준으로까지 낮아졌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MZ 세대는 1980~90년대에 데뷔한 대단히 훌륭한 아티스트들도 ‘구리게’ 보는 것이고, 이들은 음악미디어, 음악비평 자체를 경험해보지 않은 세대라서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언제 대중음악 아티스트를 아티스트답게 사회적, 문화적, 예술적으로 대접해 준 적이 있었나? 그러니 MZ세대는 대중음악 아티스트를 음악이 아닌 ‘미디어 이미지’로만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음악을 생업으로 삼겠다고 대학에 들어온 실용음악학과 학생들한테 받는 느낌도 비슷하다.

 

그런데 1980~90년대 아티스트들을 직접 경험한 현재 40~60대는 왜 자신들이 청년시절에 좋아했던 아티스트들의 음악에 돈을 쓰는 것에 관심이 떨어졌을까? 심지어 유튜브를 통해서 대중음악을 듣는 인구는 40~60대가 가장 많다는 통계까지 있는데도 말이다. 아마 이들은 음악은 어느 정도 듣지만, 결국 음악소비로 이어지게 만드는 ‘아티스트 밸류’를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은 대다수 1980~90년대 아티스트들에게서 느끼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특히나 한국에서는 대중들이 정치, 사회 쪽과는 달리 문화, 예술 쪽에서는 이상하리만치 ‘다수의 취향’에 휩쓸려 가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가장 개인적인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인터넷, 모바일 시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스마트폰, 유튜브 때문에 TV 영향력이 급격하게 감소했다고들 하는데도 실제로 내수음악시장에서는 TV 오디션프로그램 입상자들이 나이에 상관없이 음원, 공연 시장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리고 대중들은 그걸 당연시 여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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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티스트의 ‘아티스트 밸류’를 높이는 방안을 찾아야 함

1980~90년대 대중음악 거장들이 이 시대에 다시 소환되어서 마땅히 소비되어야 한다는 사회문화적인 담론을 만들어내야 하고, 이에 대한 기획이 ‘쿨’하게 진행되고 역시 소비도 ‘쿨’하게 느껴져서 ‘문화적인 트렌드’ 수준으로 격상되어야 함

 

대처방안을 쉽게 얘기하면, 한국에 제대로 된 음악미디어 역할을 할 수 있는 강력한 음악미디어가 탄생되어서 음악시장의 질서를 어느 정도 잡는 것인데... 이는 한국에서는 거의 실현되기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하나마나한 얘기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은 (말장난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 아티스트의 ‘아티스트 밸류’를 높이는 방안을 찾는 것 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 한국 음악시장은 자본이 있는 그룹들 간의 '이너서클' 안에서 움직이고 있고, 음악미디어가 없어진 20년 동안 앨범아티스트에게 지독하게 불리한 환경으로 고착화된 상태라 별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인다.

 

그래도 한번 기대를 해 보는 것은, 사람들이 청년 시절에 좋아하고 위안을 받았던 음악을 선사한 아티스트들에게 한발 다가갈 수 있는 '근사한 자리'를 만든다면 이에 동참할 사람들도 어느 정도 있지 않을까하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1980~90년대 대중음악 거장들이 이 시대에 다시 소환되어서 마땅히 소비되어야 한다는 사회문화적인 담론을 만들어내야 하고, 이에 대한 기획이 ‘쿨’하게 진행되고 역시 소비도 ‘쿨’하게 느껴져서 ‘문화적인 트렌드’ 수준으로 격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한마디로 대박나는 기획이 될 것이고, 드디어 한국에서 30~60대 대상의 어덜트 컨템포러리 음악시장이 생기는 단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사실 현재 한국 대중음악에서 BTS, 블랙핑크, 뉴진스가 대세라고 하지만 내수음악시장에서 이들 음악을 (돈 내고) 소비하는 30~60대는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30~60대 대상의 어덜트 컨템포러리 음악시장’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계획 자체는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제발 음악기업에 있는 똑똑한 사람들이 이를 해내기를 바란다.

 

 

8. “박준흠이 만난 아티스트”, 아티스트의 ‘아티스트 밸류’를 높이는 방안의 일환

- 국내 최초로 진행하는 뮤지션 인터뷰 단행본 시리즈

 

근 20년 동안 한국에 음악미디어가 없기도 했지만, 아티스트를 아티스트답게 만드는 노력은 특별히 없었다. 공중파방송에서 아티스트의 연주 영상을 세련되게 만드는 프로그램 정도가 그 한계치였다. 대중음악 아티스트 작품론에서의 핵심인 ‘디스코그래피’를 정밀하게 다루거나 아티스트의 생각과 세계관, 노래 창작배경 등을 들어볼 수 있는 인터뷰가 정밀하게 진행된 적은 거의 없었다. 특히 인터뷰와 디스코그래피, 연보, 아티스트론이 하나로 묶여서 시리즈로 인터뷰단행본이 진행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첫 번째 음반이 나온 1907년부터 116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K-POP이 전 세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나라에서 아티스트론과 작품론을 담은 인터뷰 단행본들이 없다는 것은 매우 신기한 일이다. 전 세계 음악시장 10위권 나라들에서 이런 경우는 아마 한국이 유일할 것 같다. 그러니 한국에서 어덜트 컨템포러리 음악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박준흠이 만난 아티스트”는 국내 최초로 진행하는 뮤지션 인터뷰 단행본 시리즈이고, 아티스트의 ‘아티스트 밸류’를 높이는 방안으로 2010~2015년에 대중음악SOUND vol.1~10을 발행할 때부터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비록 불발로 그치기는 했지만, 대중음악SOUND vol.11~20은 ‘아티스트 인터뷰 단행본’으로 기획을 했었다. 이후 7년 정도 지난 시점이지만, 지금이라도 ‘아티스트 인터뷰 단행본’ 시리즈를 진행할 수 있어서 기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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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왜 엄인호, 김민규, 안치환, 김창기부터 시작하는가?

- 우리의 청춘은 이들과 함께 했었지

- “무너지지 않은 예술가의 초상”

 

2022년 9월~2023년 1월에 인터뷰를 진행한 엄인호, 김민규, 안치환, 김창기는 ‘한국 음악창작자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아티스트들이다.


개인적으로는 1998~2000년에 각각 1~3번 인터뷰를 진행했던 뮤지션들이다. 당시는 대중음악전문지 ‘서브(SUB)’와 대중음악웹진 ‘가슴’, 인터넷음악방송국 ‘쌈넷’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대한인디만세>(2006년)와 <한국 음악창작자의 역사>(2008년)에 그 인터뷰들이 실렸다.

 

이번 인터뷰는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새롭게 한 인터뷰들이라서 흥미도 있고, 아티스트들의 음악세계도 어느 정도 확립된 상태에서 진행한 인터뷰라서 의미도 있다. 현재 ‘아티스트 디스코그래피’를 정확하게 쓸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들은 내가 20대 시절부터 좋아했던 뮤지션들이고, 결국 나를 음악미디어 기획으로 이끈 사람들이다. 대중음악 관련 일을 하고 싶어서 방황했던 20대~30대 초반 시절에 이들의 음악을 열심히 들으면서 이들을 만나는 꿈을 꾸게 만들었다.

 

사실 나중에 일로서 만나게 되어서 예전에 가졌던 설레임은 사라지고 인터뷰 잘해서 기록으로 남겨보겠다는 생각이 주였지만,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평생 직접 만나서 대화도 못해보고 그리워만 하다가 끝났을 것이다. 그만치 내 청춘 시절에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했던 분들이고, 만약 이 분들 음악을 좋아했다면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음악잡지 서브에서 일하기 이전에 들었던 신촌블루스 1~4집, 엄인호 1집, 동물원 1~3집, 김창기 이범용 [창고], 안치환 3~4집, 델리스파이스 1집은 내 청춘의 앨범들이다. 그래서 만약 현재 내가 대중음악 기획, 평론 일을 하지 않고 있는데, 누군가가 이들의 인터뷰 단행본을 낸다면 난 주저 없이 구입해서 읽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이게 이번 인터뷰 단행본 시리즈 “박준흠이 만난 아티스트”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첫 번째 요인이자 동인이다.

 

부디 저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많다면, 첫 번째 시리즈 10권도 잘 나올 것이고, 두 번째/세 번째 시리즈 진행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영화, 드라마, 다큐 작업으로까지 이어질 수만 있다면 정말 기쁠 것이기 때문에 시나리오 초고를 쓰기 위한 밑 작업을 한다는 생각으로 인터뷰 작업에 임했다.

 

우리의 청춘은 분명히 이들과 함께 했었다. 이를 세월의 흔적으로만 남겨버리기에는 안타까운 측면이 있다. 이들은 엄혹한 이 시절에도 여전히 “무너지지 않은 예술가의 초상” 이다.

 

박준흠(사운드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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